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군 (문단 편집) === [[금나라]] === 생여진의 완안부가 세운 금나라는 [[1211년]]에 개전한 이래 [[1234년]]에 멸망할 때까지 20여년 간 몽골과 싸웠다. 이 기간 동안 몽골은 호라즘 원정(1219년), 유럽 원정(1229년), 고려 원정(1231년) 등 많은 정복사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더불어 전쟁을 시작한 군주인 칭기즈 칸이 붕어(1227년)하는 일도 겪었다. 그야말로 몽골의 국운을 건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때 몽골인들의 국민정서를 이용했다. 금나라는 북방의 유목민족들에 대해 이간책을 사용하는 한편, 세력이 강한 부족에게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들을 통제했다. [[카마그 몽골]]의 [[암바가이 칸]]은 타타르족에게 사로잡혀 [[해릉왕]] 치세하의 금나라로 압송된 후 목마에 못박혀 처형당했고, 이때 후손들에게 복수를 명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역사적 악감정이 몽골이 금나라를 침공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적인 측면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3세기 몽골 고원의 자원은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크게 감소했다. 특히 주요 수출품이었던 말의 숫자가 줄어들어 재정이 적자 상태가 되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뭔가 획기적인 경기부양책이 필요했다. 여기에 몽골 통일이라는 정치적으로 전례없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 에너지를 대외적으로 쏟아부을 사업이 필요했다. 금나라 군대의 주력은 여진족으로 이루어진 중장기병으로, 이들은 12세기에 동북아시아를 제패한 강군이었다. 그러나 수세대에 걸쳐 이루어진 정착 생활로 인해 금군의 주력은 기병이 갈수록 감소하여[* 이때 가면 여진족들이 경제력이 좋지 못하여 기병으로 복무할수가 없었다.] 여진족 기병에서 한족 보병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개전 초기의 연이은 대패로 많은 수의 기병을 상실했으며, 초반부터 몽골군한테 목장과 목초지를 뺏기면서 기병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문에 금군은 20여년간 야전에서는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나라가 20년에 걸쳐 몽골에게 항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강한 국력과 견고한 요새에 있었다. 당시 금나라의 인구는 4,000만 명에 육박했고, 이는 몽골인의 40배에 달했다. 연경([[베이징]]) 등 화북 지역을 상실한 이후에도 중원 지역[* 금나라의 멸망 이전부터 장강 이남의 강남 지역이 이미 경제적으로는 중원과 화북 지역을 앞지르긴 했지만, 1234년 금나라의 멸망으로 초토화가 되면서 강남 지역에 확실히 뒤쳐지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때도 이민족에게 가끔씩 공격당해 고생하다가, 이후 [[청나라]]-[[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현대 중국]]에 들어서야 경제가 회복되었다. 물론 21세기가 된 현재도 강남 지방은 다른 지역을 압도한다.] 바탕으로 전쟁을 수행해 갈 수 있었다. 초기의 몽골인들은 공성기술이 부족하다보니 성채를 효율적으로 공략하지 못했고, 반면 중국의 요새들은 축성술의 발달로 견고했다. 때문에 몽골군은 야전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금군의 거점을 공략하지 못해 발길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잦았다. 초원에서의 전투에만 익숙했기 때문에 요새거점에 대한 개념도 부족했고, 승리를 거두고도 전리품과 세폐만을 받고 철수하여 금나라가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기도 했다. [[1208년]] 금나라의 [[장종(금)|장종]]이 붕어하고, 어리석은 [[위소왕(금)|위소왕]]이 즉위했다. 칭기즈 칸은 [[1211년]]의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 추정치 약 90,000이다. 당시 몽골의 추정 인구가 70만인것을 감안하면 인구를 엄청나게 쥐어짜서 동원한것이다.]을 총동원했다. 봄에 초원으로부터 이동을 시작한 몽골군은 가을이 시작될 무렵 금나라 영내로 쳐들어갔다. 금나라는 이미 수년간 몽골이 침입할 만한 지역을 따라 요새를 쭉 박아두었지만 진지하게 대비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중 가장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었던 오사보에서 벌어진 첫 접전에서 [[제베]]는 요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우회하여 후방으로부터 기습하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오사보가 함락되며 방어선이 뚫리자 금나라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완안승유는 흩어져있던 병력을 야호령에 집결시켰다. [[야호령 전투]]에는 추정치 약 400,000~500,000명[* 국경주둔군 100,000명, 중앙군 250,000명, 다른 지역에서 온 지원군 150,000명 등. 이중 보병이 350,000명, 기병이 150,000명 정도로 짐작된다.]의 금군이 집결하면서 전쟁의 승패가 걸린 결전이 벌어졌는데 금군이 수적, 지형적 이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패였다. 칭기즈 칸은 일부의 군대로 하여금 산을 넘게 하여 우회해서 수적으로 우세인 금군을 포위하는 공격을 단행했고, 기습을 당한 금군의 후방이 붕괴되는 사이 전방도 몽골군에 의해 밀리기 시작하면서[* 참고로 당시 몽골의 바토르들은 화공을 당해 갑옷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불을 끌 생각조차 하지 않은채, 금군에게 돌격했다고 한다. 피부가 탈 때 느끼는 작열통이 가장 심한 고통임을 고려하면 칭기즈 칸이 자신의 군대에게 정신교육을 제대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금군은 포위된 채로 학살을 당했다. 국운이 걸린 전투에서조차 단순한 우회 기동으로 뒤를 보일 정도이니 금군의 한심한 지휘 능력 수준을 알 만하다. 금군의 경우, 전성기때 총동원 가능한 병력수가 약 900,000~1,000,000명 가량으로 짐작되는데, 이 한 번의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절반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것이다. 완안승유는 금군의 남은 정예병을 회화보에 모아 다시 3일간 싸웠지만 패배했고, 이후 몽골군은 금군에 대한 야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했다. 1212년과 1213년에도 재차 침입했는데, 3년에 걸친 원정의 결과로 만주와 요동을 비롯한 화북 지방을 밀어버렸다[* 단, 이때 요새나 성을 제대로 공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는 한족을 고용함으로써 해결했다.]. 가장 큰 이득은 금나라 북부에 있었던 목장들을 점령함으로써 몽골이 충분한 양의 말과 목초지를 확보하여 기병을 대규모로 양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반대로 이후 금군은 기병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금나라는 [[위구르]], [[서요]], 거란족 기병에 의지했는데 이들조차 몽골군에 패하거나 가담하여 기병 전력을 사실상 상실하고 만다.], 같은 몽골계인 거란족들과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의 협력을 얻어 부족한 병력을 대거 증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수세로 몰리자 금나라는 거란족과 한족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는데, 이런 감시가 오히려 거란족과 한족의 반감을 크게 사서 반란을 촉진시켰다. 특히 거란인 3만과 한족 4만이 몽골군에 가담하여 몽골군은 16만으로 증강된다.] 1213년 칭기즈 칸은 마침내 기습을 통해 거용관을 뚫고, 만리장성을 돌파했으며 금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연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금 조정 내부에 분란이 생겨 위소왕이 암살당하고, [[금선종|선종]]이 즉위했다. 연경 포위전은 다음해 초까지 계속되었는데 공성전에 자신이 없었던 칭기즈 칸은 선종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대신 암바가이 칸의 유물과 막대한 배상금을 받은 후 철수했다.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한 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연경에서 [[카이펑|개봉]]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했고, 연경에는 황태자와 중신들을 남겨 지키도록 했다.('''정우의 남천''') 이에 자극받은 칭기즈 칸은 1214년 가을 국경지대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명분으로 다시 남하했다. 결국 1215년에 연경이 함락되었고 금나라는 화북, 만주,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상실했으며, 이에 따라 거란을 비롯하여 여진에 복속되었던 이민족들이 몽골에게로 돌아섰다. 1216년부터 칭기즈 칸이 몽골 초원과 서쪽 전역으로 이동하면서 잘라이르 [[무칼리]]가 중국 전역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무칼리가 이끄는 일군은 요동을 공략하는 동시에 개봉을 공략했다. 금 조정이 새로 천도한 개봉은 황하 남쪽에 있어서 몽골 기병이 강을 건너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기에 1216년 말부터 몽골군은 서쪽의 낙양과 장안부터 제압하려고 했는데, 우회해서 견고한 성채였던 두 도시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금나라가 병력을 모을 시간을 가지면서 몽골군은 개봉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고 이번에는 금나라가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금나라는 몽골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남송도 공격했다. 나름 남송의 땅을 빼앗아 배후를 두둑히 해두겠다는 의도였지만 이 상황에서 [[양면전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결국 1224년 견디다 못해 남송과 화평을 했다. 하지만 이 양면전쟁으로 인하여 남송과 몽골이 협력해서 공격하게 되었고, 이는 금나라의 멸망을 앞당기게 되었다. 1219년 몽골이 [[호라즘 왕조]]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초원으로 돌아가 병력을 모은 후, 무칼리를 남겨두고 서정을 시작했다. 무칼리는 부족한 병사[* 몽골군 추정치 약 20,000명 이상에 거란계, 한족 등 보조병 다수]를 가지고도 열심히 싸웠지만, 금나라는 군사를 모아 옛 영토를 탈환하기 시작했고, 연경 이남의 강역 대부분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무칼리는 1223년 장안을 공략하며 금군과 힘든 전투를 하던 도중 기진하여 병사했다[* 이때 몽골군을 지원하던 [[서하]]의 병력들이 집으로 가버려서 칭기즈 칸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서하를 재침공했다.]. 이 기간 동안 무칼리는 금나라를 정벌하는데 실패했지만 대충 금군을 중원에 가두는 데는 성공했다. 1223년 [[금선종|선종]]이 남송의 자객에게 피살당하고, [[애종]]이 즉위하자 몽골과 남송이 다시 금나라를 협공했다. 선종이 수복한 영토는 이때 다시 몽골에게 넘어갔고, 남송이 장강을 넘어 공격해 왔다[* 다음해 남송은 금나라의 요청에 의해 휴전했다.]. 몽골은 [[서하]]를 경유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1227년 서하 원정 도중 칭기즈 칸이 붕어하자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췄다. 금나라는 이를 기회라고 생각하여 공세를 감행하여, 다시 [[허베이 성|연운 16주와 서경]]을 수복했다. 그러나 몽골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주려던 본래의 의도는 달성하지 못했다. 새로 대칸이 된 [[오고타이 칸]]은 처음에는 화평을 위해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당연히 진심으로 화평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서하를 멸망시키는데 후방을 안전하게 하려는 기만책이었다. 애초부터 몽골은 금을 멸망시킬 생각이었다.] [[사망 플래그|하지만 금나라는 그 사신단을 죽였다]]. 이에 분노한 오고타이가 군대를 보내 전쟁을 개시했는데 처음에는 금군의 저항에 패퇴하기까지 했지만, 오고타이 칸은 1230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공략에 들어가 [[시안(도시)|장안]]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후 몽골군은 부대를 대규모로 쪼개서 세 방면에서 개봉을 압박했다. [[툴루이]]는 하남 및 사천 남부 방면으로 우회하여 남쪽으로부터 북진했고[* 즉 우회해서 남쪽으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테무게는 산동과 하북으로 갔으며, 오고타이 칸의 본대는 산서성을 지나 황하로 내려왔다. 툴루이가 남부에서 깽판을 치자 금군이 이를 요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동안, 오고타이는 황하를 쉽게 건너와 툴루이와 합류했다.[* 툴루이는 서전 이후에 큰 전투를 피하면서 개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랜 거리를 이동하느라 지친 금군의 주력은 삼봉산에서 오고타이와 툴루이의 몽골군에 궤멸되고 말았다. 개봉은 고립되었고, 몽골군의 악명에 내몰린 피난민들은 수도의 식량 사정을 지옥으로 내몰았다. 금군은 진천뢰 등 화약무기를 동원하며 항전했고, 몽골군은 [[노포]]로 응전했다. 오고타이 칸의 침공 시기인 1228년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기병대가 몽골 기병을 패퇴시켰다. 야전에서 금나라가 몽골을 이긴 것은 1211년 개전 이래 거의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이후 완안진화상은 몽골군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가히 금나라판 [[악비]]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로, 몽골측의 기록에도 유능하고 절개있는 장수로 묘사될 정도였다. 금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빠졌을 때 완안진화상은 2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등주에서 [[툴루이]]의 남쪽 방면군을 1차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툴루이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 완안진화상을 견제함과 동시에, 본대를 우회시켜서 수도인 개봉을 향해 돌진하면서 주변 마을을 약탈해 금군이 보급을 못받도록 했다. 개봉으로의 진격을 막기 위해 [[완안진화상]]이 10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힘겹게 쫒아갔지만, [[1231년]] 삼봉산에서 50,000명 가량의 몽골군에게 포위당하고 참패했다.([[삼봉산 전투]]) 이후 완안진화상은 몽골군에 패배하고 사로잡혀서 처형당했다. 용맹했으나 적의 특성을 파악한 후, 대처하지 못했고, 정찰에 무지하지 않고서는 당할 일이 없을 상황으로 인해 패배한 것이었다. 1233년 5월 결국 개봉이 함락되었고, 애종은 탈출했다. 이때 남송군 2만명도 [[정강의 변|오래된 숙적]]을 제거하기 위해 몽골군에 합류했다. 애종은 1234년 채주로 피신하여 새로 정부를 꾸렸고, 이를 몽골군과 남송군이 추격했다. 1234년 2월 9일 새벽 전황이 기울어 채주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애종은 황족인 [[금말제|완안승린]]에게 제위를 양도하고 자결했다. 완안승린은 채주에서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는데, 제위에 오른지 하루가 채 못 돼서였다. 마지막으로 [[곽하마]]가 대차게 저항하다가 끝내 몽골군에 패배하고 성이 함락되자 자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